최근 상담심리학을 가르치는 나의 동료 교수로부터 “가능하다면 아이는 친모의 품안에서 2년 정도를 키워주는 것이 장기적 안목으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면 2년 정도는 양육자를 바꾸지 말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미국유학중 어려운 시기에도 자신의 아이들을 적어도 2년간은 친모 품안에서 양육하도록 실천했었노라는 이야기도 곁들였습니다. 오늘날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學士) 머니’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조병화 시인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나는 소위 대학에서 배운 사람 / 어머니는 산골에서 자란 여성 /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한국 여성의 한 사람 / 그러나 학교에서, 서적에서 배운 인생보다도 / 이렇게 어머니 밑에서 배운 인생이 더욱 컸습니다.


  마리아가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에게 플라스틱 우유병을 빨리고 있는 광경을 우리는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학사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체온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유모차의 강보로 기르고 있습니다. 현대 여성의 앞가슴은 아이의 양육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보다도 미학적인 액세서리로 더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의 육체적 접촉은 시대가 흐를수록 어렵게 되어갑니다. 요즈음 아가들의 90%가 어머니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모르고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촉감이 아닌 비닐제품의 그 대용(代用) 젖꼭지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현대문명은 바로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아니라 ‘비닐 콤플렉스’에 걸린 2세들에 의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다고 꼬집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 아이들이 자꾸만 비닐봉지에다 본드 접착제를 넣고 마셔대므로 환각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외부의 변화들은 자녀에 대한 어머니들의 심리 내부까지도 흔들어 놓습니다. 현대의 어머니들은 대부분이 자녀에 대해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비로소 확고한 자신의 지위와 그 권한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러나 현대의 ‘학사 어머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의 여성들은 아이를 낳는데서 자기 인생이 시작되었지만 현대의 여성들은 도리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자라나던 모든 꿈들이 아이의 탄생으로 끝장이 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회가 달라졌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보장’ 해 주던 아이가 오늘날에는 ‘장애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저 아이만 없었던들 이혼을 할 수 있을 텐데…’. ‘저 아이만 아니었던들 지금쯤 유학해서 박사학위를 얻었을 텐데…’ 내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때 여성들은 갑자기 놀라며 귀를 틀어막습니다. ‘내가 못됐지, 이런 생각을 하다니…’ 혹시 자기는 아이들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 불안 때문에 반사적으로 자기가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으스러지도록 아이를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발작적인 소나기 사랑을 퍼붓습니다.


  가족계획이란 핑계로 중절수술을 쉽게 생각하는 현대의 어머니들은 한번쯤은 낳을까 말까 하고 망설이다 그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고치면 죽일까 말까 하는 끔찍한 살인의식을 품고 애를 낳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파티나 동창의 모임으로 집을 자주 비우는 파티 형 어머니, 여권 운동에 바쁜 세미나 형 어머니,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활약하고 있는 매스컴 형 어머니, 직장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 형 어머니… 이 많은 현대의 어머니들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님처럼 그렇게 충분히 자녀를 사랑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빠진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자녀를 히스테리컬하게 껴안게 되고, 못 다한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오늘의 어머니들은 ‘눈물’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돈’을, 즉 사치스러운 옷과 장난감을 안겨줍니다. 피아노 개인교수를 불러들이고, 미술연구소와 그리고 일류학교에 아이들을 집어넣으려고 극성을 떱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옛날의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과 그 사랑을 서로 구별하지 못한 것처럼 요즘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는 ‘물질’과 ‘사랑’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의 애정 표현은 곧 물질적 표현과 등가물(等價物)이 되고 맙니다. ‘학사 어머니’들은 물질 이외로 자녀를 사랑해 주는 모성의 본능적 방법을 잊어버린 카나리아들입니다. 때문에 지금 젊은 학사 어머니들은 크게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