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0주년이 되다 보니 16개국의 참전 용사들의 미담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16개국 참전 용사들은 단순히 총칼로만 우리를 도와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아원과 학교를 세워 전쟁고아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전쟁 후에 영특한 아이들을 유학시켜 한국의 지도자로 양육시키기도 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에 두 아들을 잃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은 6․25전쟁 때에 공산당의 총 개머리 판에 맞아 순교 당하시기까지 소록도의 애양원 교회를 맡아 지역 환자들의 고름을 입으로 빨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이국 땅까지 와서 손양원 목사님 못지않게 이름없이 사랑을 실천하다가 귀국한 여자 선교사님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아름다운 사연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씨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여선교사 2명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주민들은 며칠째 모여 감사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 자매는 1962년에, ‘마가레트’ 자매는 1966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자매는 맨손으로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자매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소록도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가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말해왔는데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을 받아 늘 감사했으며, 저희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모든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들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선교사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라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자매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여자선교사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 어루만지는 손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풂이 참 베풂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10여 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라며 피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자매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낡은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반세기 가깝게 헌신해온 두 자매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리라고 믿습니다. "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여 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 봐, 조용히 떠나갔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40여 년을 살았던 곳이었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간 고향 오스트리아는 도리어 낯선 땅이 되었지만, 작은 방 한 칸에 살면서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분의 방문 앞에는 평생 마음에 담아두었던 한국말이 쓰여있답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늘 소록도에 있으니까요…!"  이들은 최소한 평생을 선하고 겸손한 사람의 귀감이 되었던 분들이었습니다. 반대로만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