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月南 李相在) 선생을 잘 아실 줄로 압니다. 이상재 선생이 애국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패망한 민족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의 근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감옥의 벽 속에 조그만 종이쪽지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꺼내서 보니 산상수훈(山上垂訓) 마태복음 5장 끝 부분이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중략)…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입니까? 이상재 선생의 가슴 속에 콱 치미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로 대항하려는 분노와 복수심 대신에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때 펼쳐질 놀라운 하나님의 화평을 바라본 것입니다. 무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할 때 허락하실 참다운 하나님의 평강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을 나와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7월20일 고종황제가 폐위되었습니다. 절망감에 젖어있던 이상재 선생에게 또 다른 절망감이 찾아왔습니다. 바쁘게 돌아다니고 감옥에 있느라 돌보지 못했던 아내 유씨가 숨을 거뒀습니다. 아내가 떠난 지 사흘 만에 맏아들 승윤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듬해에 둘째아들 승인이 마저 세상을 떴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친구 같은 동반자였던 아내는 죽고, 미래의 희망이던 아들 둘도 한꺼번에 잃은 상황 속에서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리한 후 자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이것을 알고 선교사 몇 분이 찾아왔습니다. 게일 선교사와 YMCA 운동을 하고 있던 질레트라는 선교사, 그리고 브랑방 선교사가 왔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어떤 위로 받기도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어느 선교사님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설사 나라가 망하고 가족이 다 죽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는 아직 조국의 미래인 저 젊은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픈 과정을 허락하시면서 선생님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절망했던 그의 가슴에 아들과도 같은 수많은 젊은이가 다가왔습니다. 패망한 조선, 무너져가는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될 그 비전과 꿈을 보았습니다. 다시금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YMCA의 총무 일을 맡았습니다. 열심히 뛰었습니다. 이 백성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밖에 없다고 결단했습니다. 한 해 동안 일만 육천 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1907년 일백만 구령운동(救靈運動)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전하며 절망한 이들의 가슴에 생명의 불을 던졌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통해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1957년, 이상재 선생님의 무덤을 충남 한산에서 경기도 양주 땅으로 옮길 때, 변영로 시인은 묘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상재 선생에게서 특이할 만한 일은 삼일운동의 방법을 무저항투쟁으로 주장한 것이다. 거사를 모의하는 자리에는 천도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도 자리를 함께 했었는데, 대다수는 살육대항을 주장했으나, 오직 선생 한 분만은 우리가 죽기를 결의해야만 대의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이렇게 해서 무저항, 비폭력 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류역사상 영광된 사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다른 나라에도 저항궐기운동은 많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저항 비폭력으로 이루어진 저항운동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나 미국의 마틴 루터킹 같은 경우 외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비전이 더 많은 세계에 감동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삼일운동이 오늘날 우리 건국이념과도 함께 연결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폭력과 싸움, 보복과 복수를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화해 그리고 복수보다도 강한 사랑의 비전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비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해 삼일운동이라는 아름다운 보석 같은 역사적 사건이 우리 민족 전체에게 선물로 주어졌고 그의 후예들에 의해 해방과 광복의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비전은 절망의 자리에서 우리를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새로운 희망의 불을 댕깁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진 것이 욕망이었습니까, 비전이었습니까? 내 욕심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꿈이었습니까?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늘 열려 져 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희망은 무엇일까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꿈을 꾸게 하고, 생명력을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이 너무 흥미 위주, 프로그램 위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진정한 비전은 말씀 속에서만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흥미와 인간의 즐거움은 잠시일 뿐 지나가 버립니다. 그때 잠깐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지만 군중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통해 생명이 가슴속에 심겨질 때만이, 어두운 미래를 뚫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